Page 52 - 한국가스공사 40년사 1권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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한국가스공사 40년사
종사하던 인력을 중심으로 정부, 민간기업체 경력자를 채용한 50~60명에
불과했다. 평택에 LNG생산기지를 짓는다는 마스터플랜에 중점을 둔 시기
였다.
모든 업무의 초점이 LNG생산기지 준공에 맞추어져 있어서 필요 근무자
외에는 대부분이 현장 중심 근무가 이뤄져 여의도 사무실은 한산했다. 한
국 경제의 중심부인 여의도 전경련회관에 둥지를 틀었으나 별다른 실내
장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. 이동식 칸막이를 사용해 부서별로 경계를 나누
고 사무집기도 책상만 갖출 정도로 단출했다.
부서 간 업무가 불균형해 건설 관련 부서와 지원부서는 밤샘 근무로 일상
을 이어갔지만, 기획이나 영업 부문은 시급히 수행할 업무가 달리 없어 야
근도 교대로 하는 경우가 잦았다. 건설본부 중심으로 업무역량이 집결되
어, 인원 충원이 여의치 않은 부서는 과장과 대리가 한 명씩 앉아 업무를
보기도 했다.
인원이 충원되고 조직도 활기를 찾은 것은 1983년 말 공채 1기가 들어오면
서였다. 1983년 12월 16일, 58명의 공채 1기를 맞으며 시작된 공개채용제
도는 한국가스공사의 오늘을 만든 결정적 성장에너지였다. 1983년 10월부
터 공채 1기를 채용한다는 공고를 내고, 전경련회관 1층에 책상을 내놓고
원서를 접수했다. 공채 1기부터 치열한 입사 경쟁이 벌어져 예상을 뛰어넘
는 인원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직원과 간부가 모두 나서 며칠씩 교대로 근
무했다. 새로 설립된 공기업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공채 1기가 갖는 상징
성도 인기에 한몫을 거들었다. 당시 선발된 공채 1기 경쟁률은 약 60대 1
로, 대략 3,500명이 넘는 인원이 응시했다.
그러나 1983년 12월 15일 신입사원 임용장 수여 및 신고식을 마친 공채 1
기가 입사한 한국가스공사의 상황은 전시와 다를 바 없었다. 초창기 한국
가스공사는 천연가스 보급을 위한 기반 조성 사업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
어 신입사원을 챙길 여유가 없었다. 신입사원에 대한 교육은 체계적이지
않았고 시간도 부족했다. 공채 1기 교육도 입사 5개월 만에 급조되어, 오
리엔테이션을 겸해 충남 아산의 도고 특수훈련원에 입소해 산악훈련을 받
고, LNG생산기지 및 관로건설 현장을 견학하는 1박 2일의 빠듯한 일정을
소화하기에 벅찼다.
인원 보강을 위해 공채 1, 2기가 연속적으로 들어오는 중이었기 때문에 차
근차근 업무를 가르칠 여건이 마련되지 않았다. 그런 중에도 다행스러웠
던 점은 있었다. 무엇보다 공채를 통해 들어온 신입사원들이 입사와 함께
곧바로 실무에 투입됐음에도 스스로 알아서 업무를 익히며 한국가스공사
1983.12.16. 공채 1기 임용장 수여 의 버팀목 역할을 충분히 감당했다. 같은 시기 국내 공기업의 실정과 견주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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